유럽 정세와 각 통합전투단의 움직임
·갈리아 해방 후의 각 국의 움직임
1939년에 네우로이가 오스트마르크를 침공한 이래, 인류는 유럽에서 후퇴를 거듭, 알프스나 피레네 등의 산맥, 대하(大河), 바다를 방어선으로 하여 네우로이의 침공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1944년 9월에 제501통합전투항공단을 중심으로 한 공격으로 인해, 후소의 정규항모 한 척을 잃는 큰 손해를 내면서도 갈리아의 네우로이 둥지를 섬멸하는데 성공한다. 이것으로 인해 각 전선, 특히 서부전선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우선, 브리타니아로부터 대량의 고고도정탐 위치가 갈리아 상황확인을 위해 파견되었다. 둥지의 소멸과 네우로이의 감소가 확인되면서 온전히 전력을 보전했던 제11통합전투비행대 「HMW」를 중심으로 한 위치 부대가 투입되어 해안부의 잔존한 네우로이의 토벌 작전이 실행되었다. 그에 이어 파드칼레에 제79기갑사단을 선두로 하여 다수의 지상 위치와 기갑전력의 혼성부대가 투입되어 내륙으로의 침공을 개시하였다. 여기에는 브리타니아 군 외에도, 자유갈리아 등의 유럽각국으로부터 후퇴해온 부대도 다수 참가하였다.
하지만, 갈리아의 둥지의 소멸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브리타니아 외의 각 국은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리베리온 본국으로부터 3개 공수사단이 급히 투입되고, 뒤늦게 브리타니아로의 원군으로 올 예정이었던 5개 보병사단이 갈리아를 위한 물자와 함께 보내졌다.
카르슬란트도 로마냐 방면에 전개되어 있던 2개 기갑사단과 아프리카에 주둔하고 있던 1개 기갑사단을 이동시켰다.
후소는 육상벽력의 전개는 크게 늦었지만, 근교에 있던 함대 대부분과, 유럽으로 이동 중이던 제42통합전투비행대를 보냈다.
이리하여 각국은 갈리아의 네우로이 토벌작전에 총력을 투입, 10월 상반기까지 50만명의 군사를 갈리아에 상륙시켰다.
그 후에도 각국으로부터 파견된 군대는 크게 증가하여, 특히 리베리온으로부터 대량의 인원과 물자가 보내져 그 다음 해에는 150만까지 증가하였다. 강설에 의해 진군 속도는 저하되었지만, 쉘부르와 안트베르펜 항구로의 상륙작전의 성공에 의해 다방면으로부터 군대의 전개와 물자 공급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안트베르펜 방면은 카르슬란트로부터의 네우로이의 공격이 많았던 관계로 침공속도를 느렸으며, 주 병력은 파드칼레에서의 이동이 중심이었다.
·제501통합전투항공단의 움직임
갈리아 해방의 주역이 된 제501통합전투항공단은 초기 갈리아 토벌작전에 참가하였지만, 인원의 휴양과 교대도 있던 탓에 후소의 항보 아마기로 이동한 이후 일시적으로 해산하였다.
그 때, 카르슬란트 북서부에 소규모의 네우로이 둥지가 등장했다. 워록을 닮은 네우로이, 통칭 「네우록」의 공격을 받았지만, 근처 부대와 협력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그 뒤, 소속 멤버는 각각의 원대로 복귀, 혹은 휴가를 받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뷀케 중사와 바르크호른 대위, 하르트만 중위 세명은 그대로라인강 방면의 공격부대에 합류하였고, 그 선두로서 토벌작전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상륙거점인 파드칼레의 실질적 영주이기도 한 클로스테르망 중위도 현지의 유지관리와 부흥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각국 군전력의 진격과 파리해방
각국 군대의 주력은 파트칼레로부터 안트베르펜까지의 해안부를 확보함과 동시에 내륙으로 침공, 제일차목표로 무스강(뮤즈강) 도달을 노리고 있었다.
그와는 별대로, 브리타니아군과 갈리아군을 중심으로 한 일부 부대는 남하하여 바리 방면으로 향하였으며, 10월 안에 파리 해방과 갈리아 정부의 파리 입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무스 강 방면으로 향한 부대는 잔존 네우로이의 조직적인 저항에 고전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선두에 선 역전의 위치와, 그를 지원하는 다수의 일반병사에 의해 각지에서 적의 저항을 분쇄하여 11월 중에는 무스강까지 도달하였다.
그와 함께 안트베르펜의 동남동 약 100km에 있는 생 트롱은, 카르슬란트 항공위치의 일대 거점이 되어, 뷀케 중사나 슈나우퍼 소좌등의 저명한 에이스가 주둔, 라인강을 넘어오는 네우로이를 격추하여 주변지역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갈리아 해방에 의한 타 전선의 영향
갈리아의 네우이 둥지를 파괴했다는 정보는 타 전선에도 신속하게 전달되어 침체 분위기었던 전선이 활발하게 살아났다.
우선 동부전선에선, 북방의 제502통합전투비행단이 주둔하고 있는 페테르부르크에 카르슬란트 만슈타인 원수가 이끄는 북부집단군이 도착, 후소로부터 원조물자를 받아 스오무스와의 밀접한 협력을 바탕으로 반공작전을 실행했다. 그에 비해 남부에서는 물자가 부족한 분위기었지만, 호라샤군의 재편성이 거의 완료된 것과, 신형전차등의 투입에 의해 수세로부터 공세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 전선에서 위치의 수는 적었으나, 오라샤군의 물량공세에 의해 전선은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으며, 볼가강을 제 1목표로 진격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제505통합전투비행단도 코카서스 산맥 방면으로 북상을 개시하였다.
알프스 방면에서는, 방어전 주력 중 하나였던 카르슬란트군이 대량으로 이탈하여 갈리아 방면으로 이동하였기에, 제504통합전투항공단을 중심으로 한 로마냐군이 그를 메꾸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것도 있어 대규모 반공작전은 전력의 보충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연기되었다.
지중해 방면에서도 이 시기에 주력부대가 유렵 방면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여유는 없었지만, 다행히도 네우로이 측도 꽤나 전력이 저하되어 있었기에 제31통합전투비행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방어망으로 전선유지에는 충분하였다.
·라인강을 목표로 한 주력부대
이제, 무스강까지 도달한 서부전선에서는 제2목표로 강폭이 더 넓으며 지상형 네우로이가 넘어오기 힘든 라인강을 침공하여, 라인강 서쪽의 네우로이를 완전히 도벌하여 갈리아를 안정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카르슬란트군을 중심으로 한 1파는 무스강 연안에 안전한 거점을 다수 확보, 그곳에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집결시킨 뒤, 단숨에 라인강을 돌파하는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브리타니아의 몽고메리 장군은 위치의 지원을 받은 대규모 공수부대에 의한 다양한 지점에서의 라인강 도하를 실행하여 12월 말까지 한번에 카르슬란트쪽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라인강 공수돌파작전」을 주장했다.
카르슬란트 군으로서는 아직 자국의 군대가 집결되어 있지 않으며, 노이어 카르슬란트나 각지로부터의 충분한 전력이 도착한 뒤의 조국탈환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몽고메리 장군은 역으로 카르슬란트군의 전력이 정비되지 않았을 때 브리타니아 군의 주도로 카르슬란트로 진출, 카르슬란트쪽에 큰 빚을 지우는 것으로 전후의 영향력의 확대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라인강 공수돌파작전」의 실패
결과적으로, 「네우록」의 등장이 이 논쟁을 결착시켰으며, 조기결전을 목표로 하는 몽고메리의 제안이 승인되었다. 하지만 이 작전은 매우 복잡함과 동시에, 준비와 사전정탐이 부족하였으며, 통신기의 고장이나 예상 외의 강설 등이 겹쳐 일부 부대가 라인강 주변까지 진출했을 뿐인 실패로 끝났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작전의 중지와 전면방공작전의 연기를 결정, 지원을 해주었던 생 트론의 위치 부대와 현지에 있전 제11통합전투비행대 등에게 무스강 방어를 지시하였다.
또한, 갈리아 본국의 방어를 위해 통합전투항공단을 만드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이를 빠르게 진행하여 브리타니아와 갈리아의 위치가 중심이 된 제506통합전투항공단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리베리온 측에서도 신규 위치가 보내짐에 따라, 일시적으로는 본 항공단은 A부대와 B부대로 분리되어 서로 반목할 정도였다.
·「토라야누스 작전」와 504JFW
본래, 각 전선에서의 공세는 장래 모든 전력을 동원한 카르슬란트 탈환작전을 위한 준비공격이었지만, 라인강 공수돌파작전이 중지됨에 따라 각 부대에게는 무리한 진격을 피하고, 소모를 피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일부에서는 전선이 증가함에 따라 보급부족을 겪고 있었지만, 이 명령으로 인해 진격속도가 저하, 보급도 따라오기 시작했다. 이것을 계기로 44년 겨울에 행해진 대규모 네우로이의 공세를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공세 이후, 네우로이의 움직임이 진정되었다. 공세 기간에도 베네치아 북방의 네우로이 둥지에는 전여 움직임이 없었기에, 군부는 네우로이와의 커뮤니케이션 작전실행의 적기라고 판단, 최고사령부도 이를 승인했다.
이것이 45년 봄에 실행된 「트라야누스 작전」으로 갓 정비된 504통합전투항공단과 학자를 중심으로 한 접촉 팀을 둥지에 보내 접촉을 시도하였다. 접촉이 성공한 네우로이를 배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갈리아에 이어 남부 카르슬란트나 오즈트마르크가 해방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인간형 네우로이와의 조우에는 성공했으나, 그 후 등장한 더욱 거대한 둥지에 의해 인간형 네우로이과 그 때까지 존재한 둥지가 파괴되었으며, 새로운 둥지로부터 등장한 네우로이의 공세에 의해 베네치아가 함락되었다.
제504통합전투항공단과 로마냐의 위치부대를 중심으로 한 다수의 방어부대의 퇴각전술에 의해, 베네치아 주변의 인원의 피난에는 성공하였으나, 제504통합전투항공단은 많은 부상자를 내고 기재도 소모하였다. 로마냐에서는 수도 로마의 방공대까지 이 전투에 동원되어, 이후의 로마 방면의 방공망이 얇아지는 결과가 되었다.
·「원호작전」과 501JFW의 재결성
다행히, 후소가 유럽급파지원작전인 「원호작전」을 실시하여, 항공을 통한 사카모토 미오 소좌와 미야후지 요시카 군조를 현지에 보냈으며, 이에 응하여 뷜케 중사가 갈랕느 소장에게 직언하여 제501통합전투항공잔 재결성에 대한 명령서를 입수, 각지로부터 본 부대의 위치를 다시 불러모으며, 현지 사령부에게 기지후보지의 확보를 요청하였다.
이리하여 본 지역에서 제501통합전투항공단은 재결성되어, 로마냐의 방위에 나섰다.
·서부 전선의 그 이후 움직임
지중해 방면에서는 제501통합전투항공단이 방어에 나섰지만, 그 기간동안 서부전선에서는 갓 신설된 제506통합전투항공단이 A부대와 B부대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반복하고 있었으며, 적극적인 작전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이썽ㅆ다. 다행히도 갈리아 방면은 소강상태였으며. 부대 전체의 활동이 필요한 국면은 없었다.
한편, 최전선은 무스강 방면으로부터 조금씩 라인강 연안으로 전진하고 있었으며, 특히 안트베르펜의 항구가 본격 이동하며, 생 트롱까지 안전한 보급로가 형성된 것은 전선의 전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동시에 안트베르펜부터 마스트리흐트를 잇는 운하가 재정비되어 전선으로의 물자보급이 향상되었다.
이렇게 생 트롱을 물자집결지로 하는 것으로 동방의 마스트리흐트, 북방의 아인트호벤을 잇는 전선기지로서의 사용이 가능해졌다. 이것으로 갈리아 뿐 아니라 그 북쪽에 있는 벨기에의 해방에도 꽤나 성공하여, 결국에는 일부 부대가 카르슬란트의 아헨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또한, 아인트호벤으로부터 진출한 부대는 주변 지역을 토벌, 북방의 나이메헨까지 도달하였다. 나이메헨은 라인강으로부터 떨어진 왈(Waal)강과 무스강에 둘러싸인 도시로, 왈 강을 넘으면 라인강에 접한 도시인 아른헴이 있다. 또하느 이 때의 전과를 바탕으로, 아니메헨에서 재변된 위치부대는, 제14통합전투비행대로 격상되었다.
이 아른헴의 탈환에 성공하면, 카르슬란트로부터 네덜란드 남부로 향하는 네우로이의 차단에 성공하여 네덜란트 안의 왈 강이나 라인강의 수운을 사용가능하게 되며, 암스테르담의 해방도 가능하게 될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 이후의 각 JFW의 움직임
이 쯤이 되어, 모함전력인 제508통합전투항공단이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 해상으로부터의 밸기에, 네덜란드 탈환작전에 참가하게 된다.
동부전선에서도 반공작전에서 소모된 물자의 보급이 한창 이루어지는 중이었지만, 제502통합전투항공단을 중심으로 한 북부집단군이 제507통합전투비행단과 스오무스의 각 부대와 함께 적극 공새를 취해 스오무스의 안전확보에 주력하고 있었다.
또한, 동일 전선 남부에서는 눈이 녹으면서 생긴 진흙으로 인해 위치, 지상부대, 네우로이 모두 이동속도가 급격히 저하되어 공중전이 중심이 되었다. 이에 호응하여 움직인 제505통합전투항공단도 코카서스 산맥 바로 앞에서 정지,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